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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그대에게 행운을
| 작가 : 문정규 | |||
| 분류 : 개인전 | 장르 : 서양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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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기간 : 2026.05.07 ~ 2026.05.13 | |||
전시 개요
문정규 작가의 뛰어난 극사실 묘사에 경탄하다보면 눈이 시릴만큼 명증한 화법과 기교가 눈에 들어온다. 조직적 체계적으로 정리된 작품 파일들을 대하면 장르를 뛰어넘는 활달한 기개가 느껴진다. 나아가 미술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천명하련다는 투철한 의지가 읽힌다.
명증(明證)한 작품의 천착(穿鑿)
작가의 작품세계는 투명하고 명철하다. 누드화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는가 하면 자기화한 정물 그 중에서도 꽃의 주제를 보좌하면서 시각적 시점이동(Spannung)을 견인하는 부주제에 이르면 이가 딱딱 부딪치는 듯한 고명도의 색채조화와 당당한 구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명도의 치밀한 색채조화로 빚어진 꽃의 주제는 눈부시게 화사하다. 도대체 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 할 만큼 순수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다. 보는 사람에게 법열을 일으킬만한 꽃의 자태는 작품과 작품을 보는 시선과 영상미학을 초월하는 보편적 미의식을 시각화한다.
작품에 오브제의 형태로 등장하는 소재들은 이러한 미의식을 한층 고양시킨다. 바탕으로서의 뒤집힌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실크스크린은 객관화의 표상이다. 그 평면을 장악하는 큰 주제로서의 꽃을 향하는 무당벌레 등의 부제는 주제를 향하는 시각적 이동으로 기능한다.
작가의 호흡이 서린 작품에서 객관적 관조의 정려(靜慮)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다. 더욱이 중성적 기법의 극사실회화에서 사색적 명상적 정서적 교감을 발견하고, 보는 사람이 그 진원으로서의 작가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은 쉬운 접근법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그러나 외표되지 않는 숨은 의도에서 발견된다. 작품은 제한된 화폭과 나아가서는 전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윽고 무한정 확장한다. 작품의 소재는 일상적이면서 개념적이고 자연적이면서 문명적이며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이다. 관조의 자세로 이들은 통합된다.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평면과 입체와 행위의 혼돈과 확장은 관계를 가지면서 예술로서의 입지를 확립하련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또한 대립과 공존을 통하여 예술적 정체성Identity를 획득한다는 이른바 이원적인 추구의 통합의지를 노정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을 보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에도 동일한 감흥을 준다는 것은 내재율의 일관성을 반영한다. 일관성이란 대상을 해석하되 균일한 잣대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작가의 시선과 보는 사람의 시선이 공통의 심미안이라는 기본 맥락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품을 볼 때 판정의 기준이 되는 바 좋고 나쁨-쾌적함과 불쾌함 등의 정서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감수성을 넘어 보편타당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에는 미술사의 맥락Flux이라는 불문률이 자리잡고 있다. 미술사의 맥락은 미술의 흐름을 공유하는 작가-관중-평자가 공유하는 무언의 규범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볼 때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여 답습-승계-변혁의 평가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평가의 원동력이 되는 미술사의 흐름 혹은 일관적 맥락은 쉽게 취득되는 것은 아니다.
문정규 작가의 작품에서 미술사의 일관된 맥락과 공감대의 바탕에서 오는 감흥을 보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더욱이 미술사의 흐름에서 형성된 심미안의 예견되는 바 차이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고무적이다.
장르를 초월하는 일관성
문정규 작가의 미술행위는 정관(靜觀)의 예지를 보여준다. 행위미술의 세계는 요란스럽지 아니하고 절도가 있다. 행위미술 연행의 결과로서 보는 사람의 인상에 각인되는 감명은 평면회화가 보는 사람의 내면에서 생성하는 감동과 등가치를 가지는 인식세계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작가는 작품 앞에서 행위하고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 보인다. 작가는 때로 작품의 창조자로서의 이름을 앞세우더라도 그 주체성은 대부분 방증으로서 내장(內藏)된다. 따라서 보는 사람은 작품을 먼저 보고서 작가를 의식하고 그 인간을 가늠하게 된다. 매스컴의 역할이 커지면서 작품과 작가가 나란히 각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때로는 작가가 작품으로 동일시되기도 한다. 행위미술에서 그 등식은 대부분 작가의 판정패로 끝난다. 평면회화에서의 실패를 행위미술에서 만회하려나보다 라는 일방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해프닝이라는 어휘는 별난 혹은 엉뚱한 짓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해프닝은 다다와 초현실 등에서 기반을 다지고 실존철학과 정신분석학 등과의 폭넓은 공감대에서 사회와 교신해왔고 따라서 미술사에서 다분히 이지적 사고와 사색적 개념으로 일관되어 왔다. 아르토드(Antonin Artaud)는 해프닝="움직임, 조화, 리듬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표현하되 음악, 무용, 판토마임, 모방극(Mimicry)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 했다. 퍼포먼스에서 일반화한 바 중관(中觀)의 세계를 견지하는 문정규작가에게 적용될만한 정의라 할만하다.
문정규작가에게 행위미술과 평면작업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상보적인 위상을 견지한다. 파급력과 영향력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가를 보위한다. 따라서 행위미술의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작가의 행위는 이지적 사색적 행위를 미술적으로 보여준다는 성격이 강하게 비칠 수 있다. 평면회화와 행위미술을 나란히 놓고 문정규 작가를 본다면 어떠한 '그림'이 그려질까...아마도 작가가 그리는 그림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액자를 넘나드는 오브제들은 그 경계를 초월하면서도 안착하는 두 개의 동기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넘나듦'이라는 제목은 행위라는 미술행태와 평면작업의 천착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인의 눈과 작가 자신 성찰의 동기가 그림을 통해 넘나든다. 착실한 화업에서의 내실을 다지면서 부화(浮華)한 허명(虛名)을 좇는 세태에의 반박 논리는 예술과 삶의 동질화작업에서 볼 수 있다.
문정규 작가의 100여편 행위 중에는 1989년 나우 갤러리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소통' 처럼 삶과 예술의 정서로 분류되는 행위를 통하여 미술의 콘텍스트 안에서 행위 작품의 내재율과 공명을 일으키는 행위를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이 넘나듦의 의미일 것이다. 평면회화에서의 액자라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현재에서 내재율의 공명(共鳴)을 추구함이나 행위에서의 소통을 위한 사고는 동일한 궤(軌)를 보여준다. 그것은 오랜 질곡의 궤도(軌道)를 묵묵히 감내한 삶과 행위와 창조의 오늘일 것이다.
미술행위와 삶의 성취
작가의 작품을 일별하다 보면 현실과 이상이 묘하게 얽혀있는 이를테면 제 삼의 공간과 세계의 얽힘이 보인다. 꽃이나 누드가 액자를 넘나들거나 액자 밖의 꽃과 액자속의 사물이 거울을 사이에 두고서 독자적인 행위와 실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러하다. 실체와 다른 반사체가 공존하는 세계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마치 평행우주의 두 세계가 공존하면서도 다른 양태를 띈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법한 국면이 작가의 행위와 평면작업이 동시에 동일공간에서 벌어지고 보여지는 느낌이다. 평행우주에서의 두 사건(Event)과 정체성은 병립한 채 각자 독자적인 행위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두 세계가 홀로그램 이론에서 주장하듯 한 세계의 반영이라면 두 개의 세계는 가까워질 것이다. 겹쳐있으되 평행하는 세계라면 어떤 계기에 의해 통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통합의 세계를 살고 있다. 작가론에서 이르듯 예술의 장르들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핵가족이라는 교주고슬(膠柱鼓瑟)의 아집을 폐기하는 것은 그 두 세계의 만남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의 개명(開明)과 깨달음은 통합된 두 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작품에서 양의적(兩意的)인 의미일 것이다. 평면작업과 행위미술이, 그림에서 현실공간과 이상공간이 그러하다. 그러나 넘나듦이라는 명제에서 느낄 수 있듯 그 양의적인 세계는 소통의 공간에서 더불어 노닌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두 개의 뿔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삶의 성취 그 의욕과 정진을 느낄 수 있다는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삶의 애환과 고뇌의 흔적이 객관화한 행위미술이나 깊은 성찰의 평면작업에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나 예술지상주의로 넘겨짚을 일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한국미술의 한 흐름을 표방하면서도 그 격류에 휩쓸리지 않는 초연함은 문정규 작가의 독자성이라 만하다. 한국 행위미술의 신명성 장소성 설화성 그리고 자생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그 정의를 뛰어넘는 것은 대립되는 요소들의 넘나듦이라는 특징에서 발현될 것이다. 삶 속의 예술 그리고 예술 속의 삶이라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작가자신이 통합에서 오는 창작과 화합의 메시지를 던질 때 보는 사람이 그 넘나듦의 의미를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작가의 정진은 자체 보상으로 이어질 터이다.
그리고 현재로서의 결론
화면에서의 넘나듦이 시선의 자유로운 유영(遊泳)을 위한 회화의 거침없는 자유의지를 표상하는 것이라면 액자를 넘어 액자 주변 공간의 광활함 또는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회화적 배려일 것이다. 다시 삶에서의 정서를 객관화하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극사실이라는 중성적 기법은 작가 자신의 염원과 감추면서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저의(底意)를 노정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질곡으로서의 현재를 초탈하고자 하는 각고의 집념의 은유라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정규 작가의 현재를 진단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간의 행위와 창조가 점진적 가시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질곡의 과정에서 노정되는 간난(艱難)과 고뇌의 표징들은 더욱 심오한 천착(穿鑿)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징표일 것이다.
문정규 작가의 그대에게 시리즈 작품은 다른 세계와는 다른 그만의 특정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비(非)물질적인 조형공간을 창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간은 문정규 자신의 자아가 부활하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비물질적인 기호와 정신적인 의미가 만나 통일을 이룰 때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그 개념을 사유(思惟)하지만, 작가 문정규는 형상(figure)을 통해서 개념을 사유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의 형상으로 씌어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명료한 가치와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통합된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이와 병행하여 예술작품은 행복의 기호(signal)이다 라는 프르스트(Proust)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꽃이 향기를 내뿜듯, 행복을 기원하는 기호들을 내뿜고 있다.(이상 부분)
명증(明證)한 작품의 천착(穿鑿)
작가의 작품세계는 투명하고 명철하다. 누드화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는가 하면 자기화한 정물 그 중에서도 꽃의 주제를 보좌하면서 시각적 시점이동(Spannung)을 견인하는 부주제에 이르면 이가 딱딱 부딪치는 듯한 고명도의 색채조화와 당당한 구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명도의 치밀한 색채조화로 빚어진 꽃의 주제는 눈부시게 화사하다. 도대체 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 할 만큼 순수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다. 보는 사람에게 법열을 일으킬만한 꽃의 자태는 작품과 작품을 보는 시선과 영상미학을 초월하는 보편적 미의식을 시각화한다.
작품에 오브제의 형태로 등장하는 소재들은 이러한 미의식을 한층 고양시킨다. 바탕으로서의 뒤집힌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실크스크린은 객관화의 표상이다. 그 평면을 장악하는 큰 주제로서의 꽃을 향하는 무당벌레 등의 부제는 주제를 향하는 시각적 이동으로 기능한다.
작가의 호흡이 서린 작품에서 객관적 관조의 정려(靜慮)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다. 더욱이 중성적 기법의 극사실회화에서 사색적 명상적 정서적 교감을 발견하고, 보는 사람이 그 진원으로서의 작가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은 쉬운 접근법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그러나 외표되지 않는 숨은 의도에서 발견된다. 작품은 제한된 화폭과 나아가서는 전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윽고 무한정 확장한다. 작품의 소재는 일상적이면서 개념적이고 자연적이면서 문명적이며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이다. 관조의 자세로 이들은 통합된다.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평면과 입체와 행위의 혼돈과 확장은 관계를 가지면서 예술로서의 입지를 확립하련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또한 대립과 공존을 통하여 예술적 정체성Identity를 획득한다는 이른바 이원적인 추구의 통합의지를 노정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을 보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에도 동일한 감흥을 준다는 것은 내재율의 일관성을 반영한다. 일관성이란 대상을 해석하되 균일한 잣대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작가의 시선과 보는 사람의 시선이 공통의 심미안이라는 기본 맥락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품을 볼 때 판정의 기준이 되는 바 좋고 나쁨-쾌적함과 불쾌함 등의 정서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감수성을 넘어 보편타당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에는 미술사의 맥락Flux이라는 불문률이 자리잡고 있다. 미술사의 맥락은 미술의 흐름을 공유하는 작가-관중-평자가 공유하는 무언의 규범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볼 때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여 답습-승계-변혁의 평가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평가의 원동력이 되는 미술사의 흐름 혹은 일관적 맥락은 쉽게 취득되는 것은 아니다.
문정규 작가의 작품에서 미술사의 일관된 맥락과 공감대의 바탕에서 오는 감흥을 보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더욱이 미술사의 흐름에서 형성된 심미안의 예견되는 바 차이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고무적이다.
장르를 초월하는 일관성
문정규 작가의 미술행위는 정관(靜觀)의 예지를 보여준다. 행위미술의 세계는 요란스럽지 아니하고 절도가 있다. 행위미술 연행의 결과로서 보는 사람의 인상에 각인되는 감명은 평면회화가 보는 사람의 내면에서 생성하는 감동과 등가치를 가지는 인식세계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작가는 작품 앞에서 행위하고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 보인다. 작가는 때로 작품의 창조자로서의 이름을 앞세우더라도 그 주체성은 대부분 방증으로서 내장(內藏)된다. 따라서 보는 사람은 작품을 먼저 보고서 작가를 의식하고 그 인간을 가늠하게 된다. 매스컴의 역할이 커지면서 작품과 작가가 나란히 각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때로는 작가가 작품으로 동일시되기도 한다. 행위미술에서 그 등식은 대부분 작가의 판정패로 끝난다. 평면회화에서의 실패를 행위미술에서 만회하려나보다 라는 일방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해프닝이라는 어휘는 별난 혹은 엉뚱한 짓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해프닝은 다다와 초현실 등에서 기반을 다지고 실존철학과 정신분석학 등과의 폭넓은 공감대에서 사회와 교신해왔고 따라서 미술사에서 다분히 이지적 사고와 사색적 개념으로 일관되어 왔다. 아르토드(Antonin Artaud)는 해프닝="움직임, 조화, 리듬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표현하되 음악, 무용, 판토마임, 모방극(Mimicry)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 했다. 퍼포먼스에서 일반화한 바 중관(中觀)의 세계를 견지하는 문정규작가에게 적용될만한 정의라 할만하다.
문정규작가에게 행위미술과 평면작업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상보적인 위상을 견지한다. 파급력과 영향력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가를 보위한다. 따라서 행위미술의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작가의 행위는 이지적 사색적 행위를 미술적으로 보여준다는 성격이 강하게 비칠 수 있다. 평면회화와 행위미술을 나란히 놓고 문정규 작가를 본다면 어떠한 '그림'이 그려질까...아마도 작가가 그리는 그림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액자를 넘나드는 오브제들은 그 경계를 초월하면서도 안착하는 두 개의 동기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넘나듦'이라는 제목은 행위라는 미술행태와 평면작업의 천착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인의 눈과 작가 자신 성찰의 동기가 그림을 통해 넘나든다. 착실한 화업에서의 내실을 다지면서 부화(浮華)한 허명(虛名)을 좇는 세태에의 반박 논리는 예술과 삶의 동질화작업에서 볼 수 있다.
문정규 작가의 100여편 행위 중에는 1989년 나우 갤러리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소통' 처럼 삶과 예술의 정서로 분류되는 행위를 통하여 미술의 콘텍스트 안에서 행위 작품의 내재율과 공명을 일으키는 행위를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이 넘나듦의 의미일 것이다. 평면회화에서의 액자라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현재에서 내재율의 공명(共鳴)을 추구함이나 행위에서의 소통을 위한 사고는 동일한 궤(軌)를 보여준다. 그것은 오랜 질곡의 궤도(軌道)를 묵묵히 감내한 삶과 행위와 창조의 오늘일 것이다.
미술행위와 삶의 성취
작가의 작품을 일별하다 보면 현실과 이상이 묘하게 얽혀있는 이를테면 제 삼의 공간과 세계의 얽힘이 보인다. 꽃이나 누드가 액자를 넘나들거나 액자 밖의 꽃과 액자속의 사물이 거울을 사이에 두고서 독자적인 행위와 실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러하다. 실체와 다른 반사체가 공존하는 세계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마치 평행우주의 두 세계가 공존하면서도 다른 양태를 띈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법한 국면이 작가의 행위와 평면작업이 동시에 동일공간에서 벌어지고 보여지는 느낌이다. 평행우주에서의 두 사건(Event)과 정체성은 병립한 채 각자 독자적인 행위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두 세계가 홀로그램 이론에서 주장하듯 한 세계의 반영이라면 두 개의 세계는 가까워질 것이다. 겹쳐있으되 평행하는 세계라면 어떤 계기에 의해 통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통합의 세계를 살고 있다. 작가론에서 이르듯 예술의 장르들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핵가족이라는 교주고슬(膠柱鼓瑟)의 아집을 폐기하는 것은 그 두 세계의 만남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의 개명(開明)과 깨달음은 통합된 두 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작품에서 양의적(兩意的)인 의미일 것이다. 평면작업과 행위미술이, 그림에서 현실공간과 이상공간이 그러하다. 그러나 넘나듦이라는 명제에서 느낄 수 있듯 그 양의적인 세계는 소통의 공간에서 더불어 노닌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두 개의 뿔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삶의 성취 그 의욕과 정진을 느낄 수 있다는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삶의 애환과 고뇌의 흔적이 객관화한 행위미술이나 깊은 성찰의 평면작업에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나 예술지상주의로 넘겨짚을 일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한국미술의 한 흐름을 표방하면서도 그 격류에 휩쓸리지 않는 초연함은 문정규 작가의 독자성이라 만하다. 한국 행위미술의 신명성 장소성 설화성 그리고 자생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그 정의를 뛰어넘는 것은 대립되는 요소들의 넘나듦이라는 특징에서 발현될 것이다. 삶 속의 예술 그리고 예술 속의 삶이라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작가자신이 통합에서 오는 창작과 화합의 메시지를 던질 때 보는 사람이 그 넘나듦의 의미를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작가의 정진은 자체 보상으로 이어질 터이다.
그리고 현재로서의 결론
화면에서의 넘나듦이 시선의 자유로운 유영(遊泳)을 위한 회화의 거침없는 자유의지를 표상하는 것이라면 액자를 넘어 액자 주변 공간의 광활함 또는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회화적 배려일 것이다. 다시 삶에서의 정서를 객관화하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극사실이라는 중성적 기법은 작가 자신의 염원과 감추면서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저의(底意)를 노정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질곡으로서의 현재를 초탈하고자 하는 각고의 집념의 은유라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정규 작가의 현재를 진단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간의 행위와 창조가 점진적 가시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질곡의 과정에서 노정되는 간난(艱難)과 고뇌의 표징들은 더욱 심오한 천착(穿鑿)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징표일 것이다.
문정규 작가의 그대에게 시리즈 작품은 다른 세계와는 다른 그만의 특정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비(非)물질적인 조형공간을 창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간은 문정규 자신의 자아가 부활하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비물질적인 기호와 정신적인 의미가 만나 통일을 이룰 때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그 개념을 사유(思惟)하지만, 작가 문정규는 형상(figure)을 통해서 개념을 사유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의 형상으로 씌어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명료한 가치와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통합된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이와 병행하여 예술작품은 행복의 기호(signal)이다 라는 프르스트(Proust)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꽃이 향기를 내뿜듯, 행복을 기원하는 기호들을 내뿜고 있다.(이상 부분)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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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그대에게 풍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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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그대에게 풍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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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그대에게 풍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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